사람 사는 이야기

공정한 사회?

無之滿也 2010. 9. 15. 17:50

이명박 대통령은 후반기 국정의 기준으로 '공정한 사회'를 제시하였는데, 이는 공정한 사회가 아니라는 인식이 전제된 것인바, 환언하면 현실은 바람과 달리 '공정한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말 우리 사회가 '공정한 사회'가 아닐까?

 

먼저 정의할 게 공정한 사회라는 게 무엇인가?

 

누구나가 살고 싶어 하는 세상! 그게 바로 공정한 사회의 모습인데,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근심,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더불어 잘 사는 세상!

굳이 정의하면 그런 세상이라 할 것이다.

 

그런 세상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 최소한은 무엇인가?

어느 정도까지를 공정한 사회로 볼 수 있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가?

 

공정한 사회를 판단하는 기준은 뭘까?

 

참 달콤한 고민이다.

누구나 상상하는 바라는 소원하는 기대하는 희망하는 그런 세상을 말할테니 고민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데 평등은 정의를 뜻하므로 법현실에서 말하는 공정한 사회라 함은 결국 공평한 사회라 할 것이다.

즉, 공정한 사회라 함은 공평한 사회와 같은 것이다.

 

평등의 본질은 '같은 것은 같게, 같지 아니한 것은 같지 않게'다.

 

이 세상에 같은 게 있나?

 

아무튼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영미법상의 '합리성의 원칙'기나 대륙법상의 '자의금지의 원칙' 등이 그 판단기준으로 제시되긴 하지만, 이들 원칙이 모든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것'과 '불합리한 것', '자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것은 또 다른 가치판단을 필요로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판단기준이 명확하지 아니하므로, 결국 평등의 문제는 평균적인 동시대인의 정의감정에 비추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인데, 그래서 위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 같은 게 있나?"

 

이분법적 사고라면 배중률에 따라 있다, 없다 둘 중의 하나겠지만,

인식론의 한계를 고려하면,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의 네 가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배중률의 작용하는 인식범위로 그 범주를 한정할 필요가 있고, 그 범주 내에서는 배중률이 적용되므로, 있다, 없다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비슷할지라도 엄밀히 말하면 '같은 것은 없다'가 맞는 말이다.

 

다 다르므로 모두 다르게 해야 비로소 공평한 사회, 공정한 사회가 된다.

 

따라서 분명한 차별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차별은 인식범위 내의 모든 사실을 낱낱이 인식함으로 해서 가능하다.

즉, 낱낱이 차별해야 비로소 평등이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인식범위가 어디까지 확장할 것이냐의 문제가 발생하지만,

그 한계를 명확히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법현실의 인식범위는 내심의 정의감정까지를 그 내용으로 한정한다.

 

감정을 둘로 나누면 좋은 감정, 싫은 감정,

즉 이 세상은 좋은 것과 싫은 것 두가지로 나눌 수 있으므로,

결국 다수가 좋으면 정의고, 그에 반한 것은 불의로 심플하게 정리할 수 있다.

 

이 사회에서의 정의라는 것은 결국 수의 논리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소수가 반드시 불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소수도 존중하여 보호하자는 것인데,

소수, 그래서 사회적약자라는 사람들,

굳이 분류하면 특이한 사람들, 한 마디로 비정상의 미친 사람들이 불의라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보호해야 한덴다.

 

그 이유는 그들도 사람이니까 잘 살을 권리, 즉 행복을 추구하여 진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란다.

 

다수가 좋다고 하고, 소수가 싫은 경우,

다수가 싫다고 하고, 소수가 좋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가?

 

결론은 "판단기준은 정의감정으로부터도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도대체 뭐 어쩌자는 것인가.

 

기준이 없는데, 어쩌자는 것인가?

정말 뭘 어쩌자는 것인가...

 

정할 수 없는 것을 정하려 하니까 이 세상이 더 혼란스러운 것이 아닐까?

즉, 본래가 무질서이어서 질서를 잡을 수 없는데, 이를 거스르고 질서를 잡으려 하니,

그것이 가당한 말인가?

 

그런데 인간은 가당하지도 않은 일에 왜 그리 뻘짓을 하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보자!

 

인간은 잘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유토피아라 하지 않던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왜 뻘짓을 멈추지 아니할까?

왜?

도대체 왜 그럴까?

 

내가 내리는 결론은 달리 할 게 뭐 없으니까 그거라도 하는 거다.

한 마디로 인간은 뻘짓거리 외 할 게 없는 거다.

 

그런데 목구멍에 풀칠하려면 뻘짓거리라도 열심히 해야한다.

해봐서 알겠지만, 뻘짓거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와같이 먹고 살려고 하는 뻘짓거리에서 고통은 불가피한 것인데, 

고통을 즐길 수 없다면, 인생 참 고단해 진다.

 

따라서 왜곡하거나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낱낱이 보고,

있는 그대로를 회피, 외면하여 저항하지도 아니하고 인정하여 전면적으로 고통에 뛰어드는 게,

그나마 뻘짓거리를 덜하는 방법일 게다.

 

적당한 이유나 변명 찾아 봤자,

뭐 거기서 거기고,

오히려 찾느라 더 힘들어지니 그 짓만 안 해도,

고통이 얼마나 줄어들겠는가?

 

위 방법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면,

보다 고통을 덜하는 방법을 열심히 찾아보기 바란다.

 

그건 그대의 자유니까...

사업자 정보 표시펼치기/접기
맡기세요! 행정심판사무소 | 김성헌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수정로306번길 29-11 | 사업자 등록번호 : 129-34-25312 | TEL : 031-745-8272 | Mail : contact@matgiseyo.co.kr | 통신판매신고번호 : 제2009-경기성남-0770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